Page 104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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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서 ‘자목련’으로, 그리곤 ‘손녀’를 거쳐 마지막엔 ‘작품 사진’에 담
긴다. 봄날이 지나간 할머니가 본 ‘그 봄날’은 간단한 시어詩語 몇 개로 손
녀에게 이어지고 사진에 남는다. 물론 ‘그들의 봄날’은 의미가 서로 다르리
라. 할머니가 지금 보는 봄날이 ‘회상回想’이라면, 자목련이
지금 피운 봄날은 ‘극성極盛’이며, 손녀가 지금 사진에 담은
봄날은 ‘작품作品’이다.
「대중목욕탕」, 「쓰레기장」, 「저 무덤」, 「봄날」 등에 담긴 의
미는 이처럼 간단하다. 그러나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 ‘단
순한 의미’를 넘어선 ‘그 무엇’이 다가온다. 특히 불교적 견지
에서 보면 의미는 많이 달라진다. 중생들은 끊임없이 서로
를 비교比較하고 자自·타他를 분별分別하는 존재임을 「대중
목욕탕」은 깨닫게 하고, ‘몸뚱이’마저 결국엔 다른 쓰레기
사진 2.
『내년에 사는 법法』. 들처럼 “혼자 가서”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임을 「쓰레기장」
과 「저 무덤」은 알게 해주며, 할머니라는 존재가 직·간접적
인 원인[因]이 되어 꽃과 손녀가 태어난다는 것을 「봄날」은 보여준다. 할머니
는 꽃에게 꽃이 피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능작인能作因이 되고, 할머니는 손
녀에게 손녀가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구유인俱有因이자 같은 사람이 되도록
끌어주는 동류인同類因이 되며, 할머니·자목련·손녀는 봄날에게 협력하는
상응인相應因이 된다. 시에 포착된 ‘한 순간의 그 봄날’은 할머니·자목련·손
녀가 없으면 이뤄지지 않는다고 불교인식론은 파악한다.
『고마운 아침』(사진 3)에도 ‘수수한 단어’들로 배합된 시들이 많다. 읽을수
록 의미가 새록새록 깊어진다. 언뜻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지나 곰곰
이 읽으면 시어詩語의 이면에 스며있는 아픔에 가슴이 아련히 저려온다. 모
든 삶의 현실은 결국 ‘고苦’임을 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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