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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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이 푹푹 빠져 걸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병들다니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죽는다니
올라가려 할수록 자꾸만 미끄러졌다 내 갈 길 또한 저렇다니, 피할 수 없다니
- 「예정설」 전문 -
지금껏 걸어온 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쿠무타거 모래언덕」 전문 -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시들이다. 맑은 물처럼 명징明澄하고 담백淡
白한 의미의 이면에 배인 고뇌苦惱가 오히려 독자들을 슬며시 슬프게 한
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죽어라 살아봐야” 다가오는 새 친구들이라는
게 “고혈압, 전립선염, 어지럼증, 근육통” 등이며, 그래서 결국엔 “예수도
부처님도 피하지 못한” ‘그곳’에 가야만 한다. 다만 “구름 흘러가는 대로/
강물 흘러가는 대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떠나”간다. “내 갈 길
또한 …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生·주住·이異·멸滅,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병고病苦, 도반道伴 등과 같은 논리적
개념적인 말들을 쓰지 않고도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의 생존방식을 훌륭하
게 묘사했다. 그럼에도 시인은 “올라가려 할수록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
길을 “몸부림/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게/ 목숨”(시 「목숨」의 마지막 부분)이라
며 ‘새 친구’ 따라 그냥 가지만 말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 시집 『터널을 지나며』(사진 4)는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지혜를
돋보이게 하는 ‘방편’이 잘 조화된 시집이라 할만하다. 구김살 없는 시어詩
語들이 맑은 수채화 같은 산뜻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방편 없는 지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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