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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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초은하단은 다시 코마초은하단에 끌려간다. 이 큰 집단도 겨우 우리 주
             변의 우주일 뿐이지만, 벌써 속력을 나타내는 숫자는 의미를 상실한다. 오
             직 상대속도만 남는다.

               우리가 말하는 속도는 어떤 기준점에 대한 속도다. 그런데 우리 우주에

             서 그런 기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고정된 것이 없이 상대적
             으로 움직이는 이 우주 속에서 속도라는 것은 없다. 같이 움직일 뿐이다.
             정지한 것도 아니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정지한 적도 없

             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인 적도 없다. 속도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나

             와 대상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연기緣起하고 있을 뿐, 이것 말
             고는 다른 무엇이 없다.



             연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     우리는 먼 산의 나뭇가지에 앉은 매

             미를 볼 수 없다. 광학 이론에 의하면, 안구의 크기가 더 커지면 매미를 볼
             수 있다. 현재 크기의 안구로 먼 산의 매미를 보려는 것은 1mm의 눈금자
             로 0.01mm를 재려는 것과 같다. 먼 곳을 관찰하려면 망원경을 써야 한다.

             더 먼 곳의 천체를 관측하려면 전파망원경의 크기를 더 늘려야 한다. 어떤

             관측 장치를 사용하더라도 세계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나에게 나타나는 세
             계만 있다. 세계는 연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상대속도나 상대론에서 ‘상대’란 관측치가 관측 대상 고유의 물리량이 아

             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찻잔의 속도가 아니다. 나에게 ‘나

             타나는 속도’일 뿐이다.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찻잔의 속도라는 실
             체는 원래 없다. 실체가 없지만 나에겐 찻잔의 속도가 나타난다. 세계는 연
             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연기緣起하므로 공空이지만, 우주가 낱낱이 모두 드러난다. 연기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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