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8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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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없다.”고 지적하고는 스님들이 납부
했던 번전番錢을 반감시켜주었다. 정조
는 결코 불교에 우호적인 군주는 아니
었다. 즉위 초에는 이단을 물리치는 일
은 ‘우리나라의 가법家法’이라고 하고는
원당願堂을 철폐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을 교화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스님
들의 도성출입금지 역시 그동안 허술해
져 더욱 강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
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정책은
효과를 보이지는 못한 것 같다. 때문에
사진 2. 의승번전의 반감을 논의하는 기록.
그 역시 이전 역대 국왕이 보여준 왕실과
신민臣民이 오래전부터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일시에 혁파하지는 못한 입
장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강력한 불교억압정책을 펼치지는 못한 것 같다.
정조는 “불교가 비록 이단이지만, 인국人國에 이익이 있으며, 인적이 드문
산중에 사찰과 승려가 없다면 수어守禦의 공로를 누가 본받겠는가?”라고 하
여 스님들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대흥사와 보현사
의 청허 휴정의 사당에 ‘표충表忠’과 ‘수충酬忠’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장안사
와 신륵사를 중창하게 했다. 또한 개국 1등 공신인 무학 대사의 조그마한
초상을 모사하여 토굴에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는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사액賜額하는 일은 밀양密陽의 표
충사表忠寺와 해남海南의 대둔사大芚寺의 전례에 따르고, 대사大師의 호號도
또한 두 절의 전례를 적용하여 사액祠額은 석왕釋王이라 하고 대사에게
호號까지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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