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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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사액을 내리기 전에 이미 석왕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14년에는 석왕사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했고 다음 해에는 어제비문御製碑
             文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심은 동년 5월 “석왕사는 왕업王業이 일

             어난 곳이므로 다른 곳에 비해 소중하기가 각별하다.”고 하였다.



                  “승도僧徒가 시들고 쇠잔해진 것도 또한 유념을 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되니,

                  의승義僧에게 복무를 면제해 주고 절간의 승려에게 세금을 덜어주

                  는 것은 대체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근래에 들
                  으니 영읍營邑의 가렴주구에 시달리어 이름난 암자와 거대한 사찰
                  이 텅 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환난을 염려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만일 수령을 만나거든 면전에서 거듭

                  신칙하여 소생되고 개혁되는 효과가 있도록 하라.”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0권)



               정조가 안핵어사按覈御史 이곤수李崑秀에게 내린 글이다. 정조가 번전을

             반감시켜준 것은 승려들이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된다”는 국가사회적 기여의 대가였던 것이다.
               『정조실록』은 18세기 조선의 경제상황과 그에 따른 불교계의 사정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또한 탄압일변도의 역대 왕의 불교정책과는 다른 통치

             형태도 살필 수 있다. 맹목적인 불교탄압정책이 아닌 합리적인 정책을 펼쳤
             고, 비록 이단이지만 스님들 역시 조선의 신민臣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
             문에 『정조실록』은 조선 후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상황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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