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5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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鑑』의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
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사람이 송頌 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겠는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고 죽는 것도 아니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有一物於此, 從本以
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 一物者, 何物? 古人頌云: 古佛未生
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위에 인용한 ‘한 물건’에 대한 설명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
(ātman, 自我)의 설명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한 물
건’을 ‘일심’으로 간주하면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일심은 불
변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일심이 유일의 근본식根本識의 뜻으로 쓰인다. 즉 만유萬有 능
변能變의 마음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것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에
“자기 마음의 집착에 의해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하여 전변한다. 그 인
식대상[所見]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오직 한마음[一心]뿐이라고 말한다[由自心執著, 心似外境轉,
彼所見非有, 是故說唯心. 如是處處說唯一心].”(T31, p.10c)
그러나 천태종에서는 일심을 불변하는 어떤 실체로 간주하면 붓다의 가
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세 가지로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
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일심삼관이란 일심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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