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5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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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법정부는 서태후를 필두로 하는 보수파의 반격으로 100일 만에 무너졌
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동지였던 담사
동은 망명을 거부하고 “중국 개혁을 위해 피를 흘리는 자, 나로 시작하리라”
는 말을 남기고 기꺼이 수구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양계초는 동지
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자신은 사회 개혁을 위해 또다른 방법을 쓰겠다고
결심하였다.
일본 망명 후의 활동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청의보淸議報』를 창간하
여 왕성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의 『시무보』부터, 1898년의 『청의
보』, 1902년에 창간해서 1907년까지 계속된 『신민총보新民叢報』 시절이, 중
국인에 대한 양계초의 영향력이 가장 극대화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 잡지
에 실린 양계초의 글을 통해, 헌법, 정당, 화폐제도, 학교제도, 인재선발제
도 등의 근대 정치 제도를 비롯해, 데카르트, 루소, 칸트 등의 근대 철학자
까지 서양의 새로운 사상들이 중국에 전해졌다.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중
국 청년들, 호적胡適, 주작인周作人, 고힐강顧頡剛, 노신魯迅, 진독수陳獨秀,
모택동毛澤東 등은 물론 한국의 근대사상가들도 양계초의 글을 읽고 새로
운 세계의 꿈을 키웠다. 일본은 서양의 사상과 성취들을 왕성하게 번역하
여 전달하였고, 위로부터의 정치적 개혁을 통해 이삼십 년 안에 일본식 근
대를 선보였다.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는 식지 않는 구국열과 타고난 영민
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발력으로 몇 년 안에 광범위한 사상들을 편
력하며 그것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그 자신의 표
현에 의하면 “국체國體문제에서는 현상을 유지하면서 정체政體 방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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