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2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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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다솔사 차밭.


          사 선생이 나에게 지어주신 당호 거연居然이 그간에 서로 보이지 않은 인
          연으로 맺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연을 생각하시고
          나에게 당호를 거연으로 지어주신 것인지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여연

          화상은 효당 선생으로부터 이름을 받은 ‘반야차般若茶’를 백련사에서 만들

          고 초의 선사의 다도의 맥을 발전시켜 지금까지 많은 차인들이 함께 공부
          하며 이 차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 있는데도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햇살에 반짝이

          는 빛 가득한 차밭을 상념에 젖은 채 천천히 걸었다. 옛날과 달리 차밭이

          잘 정돈되어 있고, 차밭을 산책할 수 있게 소로小路도 예쁘게 만들어 놓았
          다(사진 12). 지난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온갖 일들이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그중에서 나는 한국지성사라는 관점에서 다솔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곰곰

          이 새겨보았다. 사람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한 세

          월 진지하게 산 그 사람들은 이야기만 남겨 두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나른한 시간에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이 긴 빗자루로 텅 빈 안심료 앞마
          당을 쓸고 있었다. 속세에 쌓인 온갖 인연을 영겁의 세계로 쓸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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