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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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개심사.


             魏弘, ?-888)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오늘날 전북 태인泰仁인 대산군大山郡과 경남 함

             양咸陽인 천령군天嶺郡의 태수로 봉직하며 변방을 돌다가 893년에 37세의 나
             이로 이곳 서산 즉 부성군에 태수로 와서 신라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있었
             다. 신라 조정에서 그를 당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보내려고 했으나 흉년으

             로 도적떼들이 들끓어 당나라로 갈 수 없는 지경이 있은 일도 이 때이다. 변

             방의 백성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신라의 상황을 걱정하다가 드디어 894년에
             국가개혁방략인 시무책時務策을 진성 여왕에게 올렸다. 이때는 이미 오늘날
             강원도 원주인 북원北原에서 지역 거점을 넓혀가던 양길(梁吉, 良吉, ?-?)의 부

             하인  궁예(弓裔, 901-918)가 기병을 이끌고 10여 군현을 습격한 일이 있었고,

             신라의 서남해안 방비를 맡고 있던 상주尙州 출신의 견훤(甄萱, 900-935)도 무
             진주(광주)에서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주변을 복속하고 있었다.
               진성 여왕은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최치원을 아찬阿飡에 임명하고

             나라를 개혁해보려 했지만 그의 말이 무너져가는 신라에 먹혀 들리는 만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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