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8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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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배웠고,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이름
                                      난 조계산 선암사의 경운원기擎雲元奇에
                                      게 『화엄경』, 『전등록』, 『선문염송』의 대교

                                      과를 수학하여 이력 과정을 모두 마쳤

                                      다. 한편 1892년 함경도의 석왕사를 시작
                                      으로 1906년까지 15년에 걸쳐 금강산 신
                                      계사, 건봉사 등 각지의 사찰에서 여름철

                                      마다 안거에 들어가 선을 수행했다.

                                        1895년에는 순창 구암사의 설유처명雪
                                      乳處明 문하에 들어가 백파긍선에서 설
                                      두봉기雪竇奉琪를 거쳐 이어져 온 법을 전
          사진 1. 석전 박한영의 모습.
                                      수했고 다음 해에 개강했다. 이때 당호를

          영호映湖라고 했고,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긍선에게 나중에 도를 깨친 이
          가 있으면 주라고 했던 석전石顚이라는 호도 얻게 되었다. 이후 대원사, 백
          양사, 대흥사, 해인사, 법주사, 화엄사, 범어사 등 호남과 영남, 호서의 주

          요 거찰에서 강론을 펼쳤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39세가 되던 1908

          년에 서울로 올라와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1911년 1월에는 한용운, 진진응, 오성월, 송종헌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열
          린 임제종 설립 임시총회에 참여했다. 이는 이회광이 주도하여 한국의 원종

          과 일본 조동종 사이의 연합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한 데 반대하며 조선불교

          의 정체성을 임제종에서 찾아 독자적인 종단을 건립하려는 운동이었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월보》를 이은 《해동불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편집
          인과 발행인을 맡았다. 박한영은 논설과 학술, 전기와 수필 등으로 구성된

          이 잡지 발간의 취지를 대승불교의 선양이라고 밝혔고 직접 글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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