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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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는 불교고등강숙에서 교편을 잡았
고, 1916년 불교중앙학림의 운영과 강의를 맡았
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족의식에 눈을
떠서 임시정부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924년에는 백용성과 함께 잡지 《불일》을 창간
하여 편집인을 했고, 다음 해에는 한국의 불서를
집성한 『조선불교총서』의 간행을 추진했다. 1926
사진 2. 『해동불보』 제1호
년에는 서울 안암동의 개운사에 불교전문강원을 (1913.11.20.).
설립하였고, 1929년 개운사 대원암의 불교연구원 강주를 맡기도 했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가 열렸는데, 7인의 교정 가운데 한 사람
으로 추대되어 교단 전체를 대표하는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63세가 되
던 1932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 근대 시기 중앙의 불
교 교육기관은 1906년 명진학교를 시작으로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강숙, 1915년 중앙학림으로 학제와 명칭이 계속 변경되었다. 또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중앙학림이 강제 폐교된 이후
1928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고,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이 계속 바뀌었다.
1945년 76세 때에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았고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초
대 교정이 되어 1946년까지 활동했다. 말년에는 전라북도 정읍 내장사에 주
석하다가 1948년 4월 8일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입적했다. 저술로는 『석
전시초』와 『석전문초』가 있고, 그 외에도 『계학약전』, 『인명입정리론회석』, 『불
교사람요』, 『정선 치문집설』, 『정선 염송급설화』, 『정선 사산비명』 등의 편저
서가 전하며, 나중에 『영호대종사어록』이 만들어졌다. 또한 신문과 잡지 등에
실은 100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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