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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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참가자는 태고사 주지 김용태, 30본산주지회의소 특별행례원인 선암
          사 주지 장기림, 해동불보사 사장 박한영을 포함하여 15명에 이르며 연례
          행사로 시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태고를 선양하고 태

          고암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 창간호에 배

          치된 태고보우 관련 글과 사진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태고보우에게서 찾
          으려는 의지를 표명한 의의가 있다.



                     초기 필진-권상로와 김룡사, 대승사 인맥



           1920년대  『불교』에  다양한  불교계  인사들의  투고가  있었지만(사진  2,
          2-1), 『불교』지 초기의 투고자와 투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권상로의 주변

          에서 잡지의 이념과 방향을 설정하고 이끌어간 주요 필진의 정체가 드

          러난다. 이들은 편집인인 권상로의 주변에서 『불교』의 논조를 상의하며
          기획하며  실행에  옮긴  집단적 개인으로 최취허崔就墟(1865년-?)와 안진
          호安震湖(1880-1965)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운 시대에 전통의식을 정비하

          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고 실천하였다.
           의식가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최취허는 명봉사鳴鳳寺에 귀일강당歸一講

          堂을 열면서 이를 기념하는 창가 <귀일가歸一歌>를 지어 『조선불교월보』(8
          호, 1912.9)에 소개한 바 있다.[필자는 『불교』 초기 호에 ‘각왕시자覺王侍者’라는 필명

          으로 일련의 시 <오인>, <공사>, <도행역시> 등을 투고한 인물이 최취허일 것으로 추정한다.]
           20년대의 『불교』지에서 권상로는 권두언에 찬불가를 발표하고 일부는 곡
          조를 붙여 포교용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불교』 7호~21호에 걸쳐 발표한

          14종의 찬불가 중 <봄마지>, <밋음>, <배후라>, <오섯네>, <불보佛寶>, <백종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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