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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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지고 나와 개원사로 돌아온 후 대비화상에게 전하였다. 이에 삼법화
          상과 대비화상은 이를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드디어 11월에 항주杭州에 와서 신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서해를 건너 남양만 부근의 당포唐浦에 내려 운암사로 돌아온 두 화상은

          비밀리에 법정스님에게 가서 알리니 모두 기뻐하며 영묘사에 마련한 단 위
          에 이를 봉안하고 경배하였다. 그때 삼법선사의 꿈에 어떤 노스님이 나타
          나 강주康州의 지리산智異山 아래 눈 속에 핀 칡꽃을 찬미하며 유택을 점지

          하는 계시가 있었다. 꿈을 깬 후 이를 대비화상과 법정스님에게 말하니 모

          두 기이하게 생각하여 강주 지리산으로 내려가 보았다. 12월인데 과연 지
          리산의 동굴 석문을 발견하고 이에 들어가니 물이 솟아나고 칡꽃이 피어
          있었다. 모두 환희에 차 장차 탑을 세우기로 하고 육조대사의 두골을 임시

          로 묻어놓았다. 그러자 그날 밤 꿈에 그 노스님이 또 나타나 “탑을 세워 드

          러내지 말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지 말라. 명名도 없고 상相도 없음이 제일
          의第一義니라. 남들에게 말하지 말고,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
          다. 그리하여 삼법선사는 돌로 함을 만들어 두골을 안치하고 그 아래에 암

          자를 세웠다. 대비화상은 백률사로 돌아간 후에 입적하였다. 그로부터 17

          년이 지난 후 효성왕孝成王(737-742) 3년인 739년 7월 12일에 삼법선사는
          내가 죽으면 운암사로 보내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니, 그 제
          자인 인혜仁慧, 의정義定 화상이 시신을 운암사로 옮겨 장사를 치르고 유물

          과 법기法器도 그곳에서 보관했다. 지리산의 암자는 그 후 초목이 우거져

          쑥대밭으로 변하였다.
           그 후 진감선사가 육조의 정상이 묻혀 있는 터에 가람을 창건하고 육조
          의 진영을 모시는 영당[六祖影堂]을 세웠다. 각훈선사는 이런 이야기를 삼

          법화상의 묵은 원고에 의거하여 쓴 것이라고 하고, 이로써 붓다의 머리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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