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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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 불가, 도가의 핵심을 보면, 이미 우
리 신라인들의 삶과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하고, 신라의 풍류사상風流思想이 그것이라
고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서술하였다.
유교가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시
대에 와서는 마침 최치원 선생이 짓고 쓴
진감선사의 비가 지금의 자리에 있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대웅전이 들어서고 새로
운 사역이 조성되면서 최치원 선생에 대한
현창 또는 숭모의 공간도 만들었다. 구 사
역에 혜능대사의 진영을 모셨던 것과 대비
하여 최치원 선생의 진영을 모시는 영당을
사진 5. 구양통의 도인법사비.
지었다. 1793년에 쌍계사에서 제작하여
모신 최치원의 진영은 1825년 화개의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질 때까지 여기
에 있었다. 도교에서 사후에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 최치원의 진영은 현재
여러 점이 남아 있는데, 쌍계사에서 조성한 이 진영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최치원을 2명의 동자승이 좌우에서 시봉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
다. 현재 운암영당雲岩影堂으로 옮겨져 있는 이 초상화는 그 후 어느 때인
가 불교적 색채가 있는 동자승의 그림이 지워지고 그 위에 책과 같은 다른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아무튼 쌍계사에는 최치원 선생에 대한 존숭의
식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
진감선사비는 최치원 선생이 짓고 직접 글씨를 쓴 것이어서 한국서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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