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P. 89

에서 보면, 최치원 선생의 글씨가 어
             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
             국에서는 해서체楷書體가 정립되어 정

             자체의 표준이 되는 글씨여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 유학생들은 거의 당나라
             해서체를 표준으로 삼아 글씨를 썼다.

             그런데  당나라  해서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이 규범적이고 방정하며 소

             쇄하고 미려한 글씨체를 만들어 내어
             가장 중심이 되었고(사진 2), 여기에서

             다소 온화하고 자유로운 우세남虞世南
             (558-638)과  저수량褚遂良(596-658)의

             글씨체가 있었다(사진 3, 4). 신라 유학
                                                 사진 6.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문.
             생들은 거의 구양순체를 썼으며, 대
             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비문의 글씨를 써서 682년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

             되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서 쓴 구양순체의 글씨가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왕희지王羲之(307-365)체를  기본으로  하되
             위·진·남북조의 비석의 글씨(碑書)를 충실히 연구한 바탕 위에 창출된 구
             양순의 글씨체는 그 아들 구양통歐陽通(?-691)에게 이어졌는데, 구양통은

             그 아버지의 글씨체를 기본으로 고수하되 너무 엄격한 부분을 다소 완화

             시켰다(사진 5). 아버지와 그를 이은 아들의 글씨가 모두 뛰어나 당시 사람
             들은 두 명필을 ‘대소구양大小歐陽’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명필 구양통은 당
             고종高宗( 628-683)의 후궁이었던 무측천武則天(624-705)의 눈 밖에 나 결국

             투옥되었다가 살해되었다.



                                                                          87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