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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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채색하여 장식하여 중생을 인
             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즉 6조혜능-남

             악회양南嶽懷讓(677-744)-마조도일馬祖道
             一(709-788)-창주신감滄州神鑑-진감혜

             소眞鑒慧昭라는  법통을  말한다.  이  법통
             이야기는 문경의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
             비鳳巖寺  靜眞大師圓悟塔碑’에  나오는  내용

             인데,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문헌에는 창

             주신감 대사에 관한 흔적이 전혀 없고, 창
             주와 숭산의 거리가 너무 먼 점과 범패가                사진 2. 구양순의 화도사비.

             하남성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한 점을 들어 하남성河南省 당주唐州 운수산雲
             秀山의 신감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

             운수산의 신감대사라고 하더라도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화상처럼 마
             조도일 선사의 뛰어난 적전 제자들 중에 손꼽히는 사람은 아니다.
               진감선사비는 진감선사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난 뒤에 조성되었다. 진감

             선사는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된 신무왕神武王(재위

             839. 4~7월)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12년 즉 850년에 입적하
             였는데, 이 당시에 문성왕은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려 했으나, 부도와
             비를 세우지 말라는 뜻에 따라서 탑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 뒤 삼기三紀 즉

             36년의 세월이 지나고 문하의 제자들과 내공봉內供奉 양진방楊晉方, 숭문

             대崇文臺  정순일鄭詢一이  비석을  세워줄  것을  아뢰니,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의 태자였던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 ‘진감선사’라 추시追諡하
             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885년에 28세의 최치원 선생이 신라로 귀국하였고, 신라는 황소黃巢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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