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고경 - 2022년 3월호 Vol. 107
P. 96

면, 이런 계보를 엄격히 따지는
                                            것도 부정확한 것을 붙잡고 있는
                                            논의일 수 있고, 붓다의 가르침은

                                            한 길인데 남북양종 어느 법을 따

                                            르더라도 역대 선사들이 이들의
                                            말을 불변의 철칙鐵則으로 고수했
                                            을 리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도 해 본다. 아무튼 이런 정황을

                                            놓고 보면 정진대사에 와서 남종
                                            선으로서의 색이 더 진해진 것 같
                                            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법계상

                                            으로 쌍계사에 육조영당까지 세
          사진 6. 장단열 서 정진대사탑비의 탑본 부분.
                                            운 진감선사 혜소화상을 지증대
          사 도헌화상 앞에 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
          증대사가 봉암사에 짧은 기간 주석하였지만, 법계상으로는 희양산문의 초

          조로 보고 양부화상, 정진대사를 각각 2조, 3조라고 보는 견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인다.
           정진대사의 뒤를 이은 형초선사의 제자 중에 법을 전해 받은 원공국사圓
          空國師 지종智宗 (930〜1018) 화상이 있었는데, 그는 스승에게서 법을 받고 승

          과僧科에 합격한 후 955년 중국 오월吳越로 가서 항주杭州 영명사永明寺의 연

          수延壽(904〜975) 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얻고,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 선사
          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962년에 귀국하여 삼중대사를 지내며
          불법을 널리 떨치고 원주의 현계산 거돈사居頓寺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희

          양산인임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최충崔沖(984〜1068) 선생이 비문을 지은 그



          94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