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고경 - 2022년 4월호 Vol. 108
P. 102

남아 있으면 이런 의문은 가지지 않아도 좋은데,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는 이런 의문은 당연히 생겨난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하더라
          도 그것이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달을 바로 볼 수 있으니까. 당우들이

          사라진 절터를 걷다 보니 망념妄念이라고 해도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홍각선사는 출가하기 전에 타고난 영특함으로 여러 경사經史에 능통하
          였다고 하는데, 지식의 면에서 보면 이때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미 유학

          에 관한 전적들이 상당히 통용되어 있었다. 신라에서는 이미 원성왕元聖王
          (785~798, 金敬信) 4년 즉 788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과거제를 실시

          하여 3등급으로 관리를 선발하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 『곡례曲禮』를 시험과목으로 하였다.
           그리고 ‘오경五經’ 즉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 춘추, ‘삼사三史’

          즉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의 글에 능통한

          사람은 시험 없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이미 신
          문왕神文王(681~692, 金政明) 2년 즉 682년에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가르쳤던
          것이라 이 당시에 오면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문사철文史哲에

          관한 이러한 지식은 충분히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던 당시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나라로 유
          학을 다녀와 외국유학생으로 대우받으며 관리가 되는 길을 더 선호하였다.
          그것은 지식의 본산에 가서 직접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기

          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사정이 이러하니 홍각선사도 출가 전

          에는 이러한 지식에 접하여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지식으로 세
          상과 인간에 대하여 자신이 가진 근본적인 의문을 풀 수 없었기에 출가하
          여 불법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홍각선사는 이후 다시 경남 합천에 있는 영암사靈巖寺에도 갔다



          100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