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고경 - 2022년 4월호 Vol.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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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 뒤쪽으로는 신라하대의 석비石碑 양식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홍
             각선사탑비가 서 있다. 【사진 8, 9】 이 비는 원래 비신이 파손되어 귀부와
             이수만 여기에 있었는데,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각弘覺(814~880) 선사는 경주 출신의 김씨로 830년(흥덕

             왕 5년)에 17살의 나이로 출가하였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할 정도로 공부를 하였고, 해인사海印寺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을 참예하
             고, 이후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기도 했다.

               해인사는 당시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이었던 만큼 홍각선사도 초기에

             는 화엄종의 교학敎學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의상義湘(625〜702) 대사의
             법손이자 도당 유학승인 순응順應(?~?) 화상이 화엄사찰로 해인사를 짓기
             시작하여 그 제자 이정利貞 화상이 완공한 때가 애장왕哀莊王(800〜809) 2년

             인 802년이다. 홍각선사가 출가한 때를 기준으로 보면 해인사가 창건되고

             화엄승들이 모여 법을 전파하던 중심지로 된 지 이제 30년이 되어 가던 시
             기인 동시에 도의선사가 신라에 귀국한 지 10년이 좀 지난 때이다.
               그 당시 해인사는 의상계의 화엄종의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던 대사찰이

             었지만 홍각선사가 해인사를 찾아간 시기에는 일대를 풍미해 온 화엄종에

             서도 선법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해서도 융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순응화상도 억성사의 상화상上和尙으로 있었으며 동종을

             주조할 때 참여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경우에도 보조국사普照
             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기본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성철性徹(1912〜1993) 대선사가 나타나 돈오점수頓悟頓修는 제대로 깨달은 상
             태가 아니어서 선종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고 화엄교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
             이라고 하며 돈오돈수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라고 한 것은 세월

             이 한참 지난 나중의 일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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