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5 - 고경 - 2022년 4월호 Vol.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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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가 단순히 서산의 의발을
전수받았고, 매년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청허 문파의 종원임을 자
부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둔사가
침체된 조선불교의 종원이자 중
흥지의 위상 또한 지니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장유張維가 지은 청허의 비碑가
대둔사에 세워지자 ‘종원의 동
표銅標’라고 한 사실이나, “서산
의 의발이 이곳(대둔사)에 있고,
영정도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
하며, 기일忌日에 제사를 올리 사진 3. 대흥사 부도밭에 있는 서산대사 부도.
는 것도 확실하며, 죽음에 이르러 부탁한 물품이 지금도 대둔사에 전해
오니 8로路의 종원이 된다.”고 한 아암혜장의 언급에서도 그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권3은 이 밖에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게 된 경
위와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과 비문의 내용, 심지어 청허의 유물 목
록까지 상세하게 고증한 후에 수록했다. 이 가운데 청허의 행적을 정리한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은 “청허의 친도親徒가 기록한 것이 아니고 뒷사람
이 추가한 것”이어서 8가지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대둔사지』 찬
자들의 청허의 행적과 사후의 평가에 대한 정리는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청
허와 함께 대둔사의 위상을 선양하여 격상시키고자 한 그들의 의도가 강
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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