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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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는 단순한 금강산 홍보용 잡지로 치부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랜 역사성과 종교성을 가진 ‘성소聖所’로서 금강산의 의미를 발굴하여 대
중에게 알리겠다는 그 의지는 민족적 자존심과도 이어져 있다.
한편 『금강산』은 당시 일제가 종교정책 중의 하나로 시행하던 심전개발
운동을 본지의 주요 지향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금강산』보다 한
달 앞서 『불교시보』(1935.8~1944.4)를 창간하면서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김태흡이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다. 『금강산』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간행된 시대적 산물이다.
금강산불교회라는 조직 기반
표훈사 주지 최원허는 금강산의 본래면목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권상로에게 발행과 편집을 전적으로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공식 기관으로 금강산불교회를 조직하여 교
계의 지식 인프라를 통해 공동의 불교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창간호
가 1935년 9월 5일 발행되었는데, 금강산불교회 창립총회는 9월 7일 경성
의 각황교당에서 개최되었다. 『금강산』 창간호 발행을 기회로 창립총회의
명분을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회의에서 사회는 이춘경이 맡았고 출석 인원은 22인이었다. 취지 설
명은 최원허가 하고 회명을 토의한 결과 금강산불교회로 결정하였다. 당
시 좌장席長은 권상로였으며, 권상로의 추천[自辟]으로 최원허, 안진호, 김
태흡 3인이 임원 선정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들의 추천으로 회장 최원
허 외에 고문으로 송만공, 송종헌, 임석진, 박한영, 방한암 등 44인의 대
덕이 선정되었다. 고문단은 당시 교계의 명사를 총망한 것이었지만,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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