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1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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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놓은 주석을 붙인 원칙이다. 그가 고증에 제가의 설을 널리 참고하는 태
도가 주목된다. 정약용의 이러한 저술과 주석의 원칙은 찬자들이 대둔사
창건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생몰년과 활동시기, 삼국의 정세 등을 기초
로 대둔사의 창건을 고증한 것이나, 찬자들의 고증을 통해 피력한 각자의
견해이기도 한 ‘안설按說’이나 ‘운설云說’의 형태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무징불신無徵不信’의 유교사관은 그 영향이 가장 뚜렷
한 것으로 고대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삼국유사』와 같은
불교 사서를 근거가 없는 설화나 미신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둔사지』는 대둔사 내외의 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전의 『대
둔사사적기』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산일散逸된 우리나라 고대불교사 기
록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당시 실학자들의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비판, 고증의 방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의 성과
를 거두었던 것이다.
고대불교사 복원에 기여
둘째, 우리나라 고대불교사 복원에 기여한 점이다. 『대둔사지』의 찬자들
은 우리나라 고대사나 불교사 지식, 많은 자료들을 활용하여 대둔사가 법
흥왕 13년(514)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그들
은 대둔사의 중건이 자장과 도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전의 기록 또한
부정했다. 의상과 원효가 대둔사에 주석하였고, 의상이 당의 침입을 불
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대둔사에 밀단密壇을 설치하고 기도를 드렸다거나,
대둔사가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였다는 오류 또한 비판했다.
찬자들의 이러한 찬술태도는 단순히 대둔사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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