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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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상원 2년(761)에 숙
종의 명에 의하여 남양에서 40
여 년을 수행하던 혜충이 장안
으로 초빙되었음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신회가 입적한 지 2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장안에 들
어간 후에 숙종과 대종에게 보
살계를 주었고, 대력大曆 10년
11)
(775)에 광택사에서 입적 하기
까지 15년을 ‘국사’로서 제도帝
都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주의 사진 2. 장안 광택사 석조불상.
할 것은 숙종이 혜충을 장안으
로 초빙한 의도라고 하겠다. 본래 숙종은 하택신회를 장안으로 초빙하여
장안에 주석시키려 하였으나 입적하여 가능하지 않게 되자 바로 혜충을 청
했다고 추정된다. 신회와 혜충은 모두 혜능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혜충을 초빙한 까닭은 ‘안사의 난’으로 혼란한 민심을 불교를 통하여 통합
하려는 의도라고 추정된다.
안사의 난은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던 당조를 한순간에 초
토화시켰던 사건으로,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인구 70%가
감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황권과 지식인들에게 심각한 사상적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유학에 있어서는 ‘고문古文운동’
과 ‘유불융합儒佛融合’을 제창했고, 불교에 있어서도 ‘제종융합諸宗融合’과 유
11) 앞의 책(補遺編25, 363a), “師大曆十年十二月九日終, 代宗諡號大證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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