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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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은 고려 초기에 정당문학政
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와 문하평장
사門下平章事를 지낸 명신名臣이었다.
아무튼 낭공대사탑비는 바로 세워
지지 못하고 고려시대에 와서 광
종光宗(재위 949~975) 5년(954년)에 봉
화군 태자사에 단목端目화상이 김
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세웠다. 비 건립의 전말은 낭공대사
의 법손인 순백純白 화상이 비를 세
울 당시에 ‘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
후기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를 추
가로 짓고 역시 김생의 글씨를 집자
하여 비의 뒷면에 새겨 놓았다(사진
사진 3. 낭공대사탑비 후면.
3). 낭공대사탑비의 글씨는 숭태嵩
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 화상이 새겼고, 비 건립 실무의 총책임은
석남사 장로인 형허逈虛 화상이 맡았다.
낭공대사탑비의 운명
이 비는 그 후 태자사의 당우들이 사라진 빈 터 수풀 속에 오랫동안 방
치되어 있었다. 1509년 지금의 영주인 영천榮川 군수로 와 있던 이항李沆
(?~1533)은 이 비가 봉화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 절터에 가서 발견하
고 김생의 글씨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과거 안평대군이 편집한 『비해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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