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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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이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다시 명나라 사신에게 물어 비
로소 비석이 있는 곳을 알고 관리를
특파하여 탁본을 해갔다고도 했다.
남구만 선생은 우리 보물의 가치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중국 사람들
이 더 귀하게 여겨온 세태를 안타까
워했다. 웅화熊化가 조선으로 온 때
는 1609년(광해군 1)인데, 이때 선조宣
祖(1567~1608)에게 명나라 황제가 시
호를 내리는 사시사賜諡使로 왔다. 당
시 조선의 최고 문장가이자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월
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선생
이 빈접사儐接使가 되어 웅화 일행을
사진 4. 소수서원 소재 낭공대사탑비의 탑본.
영접한 후 서로 글을 주고받았는데,
그 후 조선에서는 월사선생이 받은 웅화의 글씨를 모아 『웅화서첩熊化書帖』
을 만들어 애지중지하였다.
또 남구만 선생은 이 비의 탁본 청탁이 워낙 많아 민폐가 심해져 비석이
있는 곳을 마구간으로 만들고 말똥과 거름으로 파묻어 탁본할 수 없게 한
일도 있었는데, 이 와중에 비석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런 사실은 그의 문집 『약천집藥泉集』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유명한 비석이
나 유명 글씨를 새긴 서판書板의 경우는 대부분 이런 수난(?)을 겪었다. 탁
본의 청탁이 워낙 많아 실물이 손상을 입는가 하면, 탁본을 하는 데 먹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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