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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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첩匪懈堂集古帖』에 실린 김생의 필적을 보고 이를 좋아하였는데, 이곳에
          서 김생의 글씨로 된 비석을 발견하고는 감격하여 영주의 자민루字民樓 아
          래로 옮기고 난간과 지게문을 설치하고 탁본할 때 이외에는 사람들의 출

          입을 금지하였다.

           이항은 10년 후 1519년(중종 14)에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 신진사류들
          이 새로운 개혁정치를 펼쳐나가는 것에 반발한 훈구세력들과 작당하여 기
          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심정沈貞(1471~1531)의 수하로 들어가 날뛰다가 결

          국 중종 28년에 같은 수하인 김극핍金克愊(1472~1531)과 함께 사약을 받고

          황천길로 갔다. 세상에서는 이 3명을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고 불렀다. 예
          나 지금이나 완장을 차면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칼춤을 추다가 폐가망신廢
          家亡身하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데, 역사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지 못하

          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마천司馬遷(BC 145?~BC 86?)이 들으면 탄식할 얘

          기이지만.
           그 후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이 1662년(현종3) 암행어사로 영남지
          역을 시찰하던 도중에 3월 초 영주에 도착하여 이 비를 보았다. 이때는 100

          여 년 전에 이항군수가 설치했던 난간과 지게문은 없어졌고 탁본으로 인

          하여 앞면의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여서 비를 뒤집어 보다가 뒷면
          에 글자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임진년
          (1592, 선조25)과 정묘년(1627, 인조5) 사이에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탁본을 한 것이 거의 수천 본本이었는데, 이때 추운 날씨로 얼어

          붙은 먹물을 녹이느라 숯불로 가열하는 바람에 비석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했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인 웅화熊化(1581~1649)가 조선으로 왔을 때,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백월비白月碑의 탁본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조정에 있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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