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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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당시 왕실 원찰의 책임자이고 건성원의 주지로 있던 통진대사通眞大師
양경讓景(879~?, 도당 유학: ?~928) 화상이 75세의 나이로 스승의 비 건립을
주도하여 문도들과 함께 낭공대사의 탑비를 태자사에 세웠다.
양경화상은 김씨로 육두품 출신으로 벼슬을 하다가 출가를 하여 태자산
사에 주석하고 있던 행적화상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그가 행적화상
을 찾아간 시기는 행적화상이 왕경을 떠난 898년 이후 왕경으로 다시 돌
아와 국사가 된 907년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행적화상은 태자산
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태자산사는 조그만 거처라서 낭공대
사의 비에는 기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 때에 오면, 승계제도와 승과제도를 시행하면서 화엄종을 중
심에 놓고 불교계를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강력한 통제 하에 두는 방향으
로 나가는데, 이 당시 선문들
은 중심 사찰을 중심으로 결
속을 다져나가는 모습을 보
이기도 했다. 굴산문은 태자
사, 동리산문은 옥룡사, 희양
산문은 희양원, 봉립산문은
고달원, 사자산문은 도봉원
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려의
고승들의 탑비와 부도탑을
세우고 새로이 결집을 도모
하였다.
고려에서는 굴산문의 제자
들이 전국 사찰에 주석하고 사진 1. 통진대사비 잔편 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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