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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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데, 굴산문의 맥을 이어온 양경화상은 고려 초기에 왕건의 힘을 입
어 이 태자사를 거점으로 정하고 그의 스승인 행적화상의 비를 세우면서
굴산문파를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 양경화상은 행적화상이 입적할 때는 당
나라에 있어 임종을 하지 못했는데, 고려 개창 후에 문도들과 같이 태자사
에 스승의 비를 세워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자파 세력을 다시 결집하려
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태자사가 있은 봉화는 경주에서 개경으로 오
르내리는 최단거리 도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이었다.
통진대사 양경화상의 탑비는 사라지고 없다. 그 비의 깨진 잔편 일부가
1896년 을미의병 와중에 불타버린 옛 용수사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가 발견되어 현재의 용수사에 보관되어 있다(사진 1).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태자사에 최인연이 지은 낭공대사탑비와 고려의 좌간의대부左諫議大
夫 김심언金審言(?~1018)이 지은 통진대사비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낭공대사탑비의 비문을 쓴 최인연
최인연 선생은 행적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문인門人이고 집안사람으
로 아낌도 받았기에 그 정이 남아 있어 기꺼이 붓을 들어 양경화상의 친형
제인 윤정화상이 지은 낭공대사의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비문을 지었다. 최
인연 선생이 지은 이 글은 그의 종형인 최치원 선생의 문장에서 보듯이 유
가, 불가, 도가의 개념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면서 지은 명문이다. 그는 글
을 다 쓴 후 비의 사詞에서 다음과 같이 쓰면서 불법의 요체를 표현하였다.
至道無爲지도무위 지극한 도는 무위이니
猶如大地유여대지 마치 대지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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