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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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1호 | 거연심우소요 居然尋牛逍遙 21 |    그 후 대사의 제자인 신종선사, 주
            태자사지 ②
                                         해周解선사, 임간林侃선사 등 500여
                                         명이 스승을 추모하며 왕에게 비의

                                         건립을 청하였는데, 신덕왕의 아들
         명나라까지 알려진                       인  경명왕景明王(917~924)이  선왕의

         낭공대사탑비의                         숭불 정신을 이어 시호를 ‘낭공대사’

         명성과 수난                          로 추증하고 탑명을 ‘백월서운지탑白
                                         月栖雲之塔’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최

                                         인연 선생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다.
         정종섭

                                           태자사에 세운 낭공대사탑비




                                           그런데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고려
                                         로 다시 통일되는 혼란의 시기를 맞
                                         이하면서 비는 바로 세워지지 못하

                                         고 대사가 입적한 때로부터 36년 후

                                         에 비로소 세워지게 된다. 낭공대사
                                         의 뛰어난 제자들로는 용담사龍潭寺
                                         식조式照, 건성원乾聖院 양경讓景, 연

                                         ○사鷰○寺 혜희惠希, 유금사宥襟寺 윤

                                         정允正, 청룡사淸龍寺 선관善觀, 영장
                                         사靈長寺  현보玄甫,  석남사石南寺  형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
           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한逈閑, 숭산사嵩山寺 가언可言, 태자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헌법학 원
           론』 등 논저 다수.                   사太子寺 본정本定 화상 등이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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