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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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동일한 ‘혜월거사’, ‘유성종인’의 장서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신당서목』은 대략 860여 종 5,600여 권의 불서가 기록된 목록이다.
             백련암 불서에서 유성종의 책을 확인한 터라 『덕신당서목』에 기록된 불서

             들이 유성종의 장서일 것이라는 심증이 갔다. 유성종의 장서인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조선 초기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850여 명
             의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인보印譜를 엮은 『근역인수槿域印藪』에도 수록되
             어 있었다. 유성종의 자호字號는 혜월慧月이며, 본관은 서울 지역을 관향으

             로 삼는 한양 유씨劉氏로, 근대에까지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을 19세기 문헌에서 연이어 찾을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성종의 활동




               유성종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찾지 못했지만 그의 직업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1846년(헌종 12) 26세의
             나이에 반감飯監에 임명된 후 1878년(고종 15) 58세에 오위장五衛將으로 관

             직을 그만둘 때까지 30여 년간 궁궐에서 일했던 인물이었다. 반감은 조선

             시대 사옹원司饔院에 소속된 잡직雜職의 하나로 궁궐 내 음식조리를 지휘하
             는 책임자였다. 비록 차비노差備奴의 낮은 신분 출신이었으나 궁중에서의
             직무 때문에 품계와 직위가 주어졌다.

               유성종의 활동에 대해서는 19세기에 간행된 여러 불서의 서·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849년 29세 때에 유성종은 유·불·도 삼교에 밝았던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1870)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였다. 1854

             년(철종 5)에는 명나라 통윤通潤(1565~1624)이 주석한 『유마힐소설경직소維
             摩詰所說經直疏』를 쌍월성활雙月性闊에게 보여주고 간행을 돕기도 했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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