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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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웠으며, 담연은 그를 위하여 『지관대의止觀大意』를 찬술하였다고 한다. 또
          한 『대일경大日經』 등의 밀교 경전을 번역한 선무외善無畏(637~735)로부터 밀

          교를 배웠다. 그러나 만년에 그는 법융의 5세손인 경산현소徑山玄素[鶴林玄素,
          668~752]를 스승으로 모시며 우두선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의 비명은 바로 경산현소가 입적한 후 찬술한 것이다. 이 당시는 안사
          의 난(755~763)이 발생하기 이전이지만 이미 동산법문이 천하를 장악한 시
          기이다. 따라서 이화가 자신이 신봉하는 우두선의 법맥을 동산법문에 연

          결한 것은 바로 우두선에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

          다. 실제로 현대의 선종사 연구에서는 이러한 법계는 도신이나 법융 등의
          활동 시기와 입멸년도 등으로 추정하면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이화가
          조작하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결코 같은 계통이라

          고 볼 수 없다.



            우두선에 귀의한 이덕유와 회창법란



           그런데 안사의 난 이후에 갑자기 양관楊綰(?~777), 진소유陳少游(724~784),

          배도裵度(765~839), 최군崔群(772~832) 그리고 회창법란의 주역인 이덕유李
          德裕(787~850) 등과 같은 조정의 고관들이 우두선에 귀의함을 볼 수 있다.                5)
          이들은 모두 조정의 최고위직을 맡았으며, 특히 이덕유는 회창법란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었다. 이와 같은 고관들이 무엇 때문에 우두선에 귀의했

          을까? 이는 회창법란의 주역인 이덕유의 불교에 대한 이해로부터 추정할
          수 있다.




          5) 김진무, 『중국불교의 거사들』(운주사, 2013.), pp.137-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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