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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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불교에 상당히 깊은 이해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나아가 당시 당
          조의 부흥을 위해 민족적 정체성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에서 중국에 가장
          적합한 불교가 바로 우두선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유학과 현학을 함께 닦았다.”라는 유우석의 평가는 이덕유가 우두

          선에 심취한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두
          선은 삼론종과 그의 영향으로 출현한 ‘중현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이는 다른 불교나 선사상보다 중국적 사유양식에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회창법란이 비록 도교에 심취한 무종武宗이 개
          성開成 5년(840) 조귀진趙歸眞 등 81명의 도사를 불러 황궁에 도관道觀을 설
          치하면서부터 비롯되었지만,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던 이덕유가 적극적으

          로 찬동한 까닭은 바로 기존의 모든 불교를 없애버리고 ‘우두종’만을 남기

          고자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회창법란 시기에 이덕유가 수많은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주살했지만 우두종 계열의 승려와 사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두종을 건립시키려 했던 의도를 충분히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회창법란 이후 우두종의 득세와 사상적 삼투



           4년에 걸친 회창법란은 중국불교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덕유의 의도와 같이 결국 우두종이 득세를 하였고, 또한 이화
          와 유우석이 설정한 법계에 따라 동산법문으로부터 발생한 남종선도 비교
          적 피해를 덜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이후의 조사선에는 우두선

          의 사상과 철저하게 융합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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