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2년 9월호 Vol.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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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는 숙종시대인 1675년에 출간된 『도선국사실기道詵國師實記』에
          실린 이래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속설의 확산과 함께 절 이름도 운
          주사雲住寺라고 하지 않고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했다. 석불과 석탑의

          조성이 돌무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니 불상을 만들고 불탑을 조성하여

          공양하는 『법화경法華經』의 조불조탑造佛造塔 신앙과도 연관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우선 『도선국사실기』라는 기록이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받
          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운주사의 유적들이 12~13세기의 양식인

          점을 근거로 9세기의 인물인 도선국사를 운주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허황

          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17세기에 들어와 도선의 비보裨補사찰
          설, 비보신앙, 풍수도참설이 전국으로 퍼뜨려지기 전 현종(顯宗, 1659~1674)
          대인 1656년 간행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고려의 혜명慧明화상이 수

          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불상과 탑을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사

          실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풍수는 밀교密敎에서 도량道場을 개설할 때 위치 선택을 중요
          시한 택지법擇地法과 연결이 되어 있고, 도선화상도 밀교계열의 승려일지

          도 모른다며 걸핏하면 불교에 도선국사니 비보사상이니 풍수지리니 하는

          것을 끌어다 붙이지만, 싯다르타에게 한번 물어보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
          침인가를!  불교의  진면목은  사라지고  도선국사니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니 하며 풍수, 도참, 예언, 비기 등 온갖 잡설이 붓다의 진리를

          밀어낸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해 볼 일이다.

           풍수 아니면 자주 등장하는 것이 미륵彌勒이다. 운주사의 석불이 투박하
          고 어설픈 것을 하층 민중들의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기존질서에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기원하며 신

          분해방의 소원으로 석불과 석탑을 쌓다 보니 골짜기에 천불천탑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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