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1 - 고경 - 2022년 9월호 Vol.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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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했다. 1931년 서울의 중앙불
교전문학교를 졸업했고, 도서
관의 사서로 일하기도 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
요東洋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
고, 1937년에 학부를 마친 후
사진 2. 중앙불전 전경.
돌아와 1939년 경성제국대학
종교학연구실 전공과(대학원)에 진학했다. 1939년에는 모교인 중앙불전에
서 강사를 했고, 194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종교학연구실의 부조수를 거
쳐 다음해에 조수가 되었다. 1943년에는 경성제대 만몽학술조사단에 참가
하여 만주와 몽골 일대의 유적을 답사했다.
해방이 되고 1945년 9월 다시 문을 연 혜화전문학교(옛 중앙불전) 불교학
과의 교수가 되었다. 식민지 잔재를 벗어내고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
려는 한민족의 염원이 분출된 해방 정국에서 그 또한 상아탑의 울타리 안
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명기는 1946년 4월에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모여 조직한 ‘혁명불교도동맹’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동맹의 강령은 불
교교단의 개혁, 조국의 광복과 사회혁명 등이었다. 창립대회에서 제시된
7개 당면 주장은 ‘승니와 교도의 구별, 사찰 토지의 국가사업 제공, 승려의
생업 종사, 본존은 석가불만, 간소 엄숙한 새 의식 실시’가 그 골자였다.
1946년 12월에는 그가 참여한 혁명불교도동맹을 비롯한 불교계 혁신 단
체들이 ‘불교혁신총연맹’을 결성했다. 다음해 5월에는 조선불교 총본원이
세워지고 ‘전국불교도총연맹’이 출범했다. 전국불교도총연맹은 10개의 당
면과제를 내걸었는 데 그 안에 포함된 “조선 민족의 생활 원리가 될 교학
체계를 확립하자”는 문구는 이후 조명기의 저술 내용에서도 엿보인다.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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