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22년 9월호 Vol.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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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모른다고 대답할까?’
‘선사님이 실망하지 않을까?’
‘그러면 공이라고 대답할까?’
‘불성이라고 해볼까?’ ‘어떤
스님처럼 고함을 쳐볼까?’
‘경전 구절을 외워 바칠까?’
‘어떻게 하면 선사님이 나를
흡족해 하실까?’ 다양한 갈
래의 생각과 갈등들이 일어
나 동자의 머리에서 죽처럼
끓어오른다. 무명이 창궐하는
현장이다.
한 찰나에 청정한 여래의
사진 1. 『운암선사어록』.
자리에서 무명의 땅으로 떨
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동자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 우리는 누
구나 찬물을 마시면 찬 줄 알고, 따뜻한 물을 마시면 따뜻한 줄 안다. 여
래의 움직임 없는 지혜의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딱히
어느 지점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한순간에 분별이 일어난다. ‘더운 여름
엔 역시 시원한 물이 딱이야!’, 혹은 ‘이 더운 날에 뜨거운 물은 영 아닌
데?’ 그리고는 번뇌가 일어난다. ‘시원한 물을 내어준 이 사람이 좋다.’ 혹
은 ‘더운 날 뜨거운 물을 내어주는 이 인간은 도대체 뭔가?’ 이처럼 분, 초를
나눌 틈조차 없이 탐진치와 그에 부수된 번뇌의 작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고 나타난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나와 대상에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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