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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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선조로 인식한 것을 비판하였다.
           아울러 “만덕사의 동쪽 기슭에 보조탑普照塔이 고래古來로 목우자牧牛
          子의 사리舍利를 감춘 곳이라고 하고 목우자를 만덕의 선조로 삼았다.”는

          지적에(『만덕사지』 권2) 대해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생애와 흔적을 기초로 비

          판하고 “동강東岡에 있는 보조탑은 본사本寺의 정오국사丁午國師인데 그도
          호號를 불일보조라 하였으니 이것은 정오의 장주藏珠이다.”라고 하였다.



            찬자들의 성과와 오류



           이와 같이 『만덕사지』는 수집한 자료를 기초로 그 진위를 바로잡고, 소
          략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피력하였다. 흩어져 전

          해 오고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고증작업을 거쳐 만덕사의 역사뿐만 아니

          라 고려시대 불교사까지도 재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덕사지』 찬술
          자들이 기울인 노력은 만덕사의 복원에 머물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는 잘
          못된 만덕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었지만, 동시대 유학자들이 허

          무맹랑하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고 비난했던 불교사를 바로잡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찬자들이 찬술의 과정에서 보인 오류도 발견된다. 예컨대 자굉은
          제3 원환에 대해 의선義璇으로 이해하였지만, 의선은 조인규趙仁規의 넷째

          아들로 그 활동 시기가 원환이 백련사 제3세 주법主法을 맡았던 1248년과

          는 시기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또한 찬자들은 원환을 만덕사의 8국
          사國師의 한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국사國師의 칭호는 『만덕사지』에서
          만 찾아볼 수 있으며, 찬자들이 제시한 원환에 대한 자료 역시 그가 국사

          임을 입증하기에는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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