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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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지방에 선종이 확산되어 가던 때임에도 민중들
에게는 미륵의 목소리가 더 컸던 것 같다. 하기야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
經』(Milinda왕문경, Milinda-paṅha)」에 나오는 서북인도에 있었던 인도-그리
스 왕국인 박트리아Bactria(BC 246~BC 138)의 왕 메난드로스Menadros(BC
160~BC 140 추정) 1세, 즉 알렉산더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36~BC 323)
의 동방원정 때 그 휘하에서 활약한 장군의 후예인 그리스인 밀린다왕도 자
신을 구세주라고 했으니, 미륵신앙을 믿은 것인지 고대 여러 종교에서 받
아들여지던 구세주사상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연구해 볼 일이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사실들
1984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운주사에 대한 발굴조사에 따라, 운
주사의 원래 금당 터가 드러났고, 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무리굽 청
자조각과 순청자 접시조각, 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되어 운주사 창건 시
기가 고려 초기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중기의 상감청자 파편
들과 14~15세기의 청자 파편들이 다량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운주사가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雲住寺 환은천조丸恩天造,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적힌 암막새 기
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運舟寺가 아니라 雲住寺라는 것도 밝혀졌다. 따
라서 이곳이 배 모양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날조된 잡설임이 드러났다.
유물에 의하여 조선시대 연산군 1년(1495)에 중창된 적이 있음도 밝혀졌다.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綾州牧誌』에는 “운주사는 오늘날 폐사가 되었다
(雲住寺今廢).”라는 기록으로 보아 중창된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800년대 초에 와서 설담자우雪潭自優(1769~1831) 화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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