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2년 11월호 Vol.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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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분골쇄신粉骨碎身 구국의 활약을 펼친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승과로 배출된 뛰어난 인재였다. 임진왜란과 정묘재란丁卯再亂
등의 전쟁에 나가서 죽은 승려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대사의 제자이자 봉은사 주지를 지내기
도 했던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 대사도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 등
을 맡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는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승병장으로 구국의 헌신을 하였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조선에서는
나라가 초토화되는 이런 전쟁을 거치면서 의승군의 활약과 공로로 인하여
불교가 다시 살아남게 된다.
평소 공자와 맹자를 떠들던 사람들이 결국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 떨어
지게 만들어 놓고는 급하면 천민賤民 취급하던 승려들에게 목숨 걸고 나라
를 구하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발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백성과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진정 붓다의 가르침인가? 걸핏하면 공자와 맹
자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들이 보우화상을 유배지에서 패서 죽인 짓은 어
떻게 설명해야 하나? 우리 역사에서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 피범벅으로 만
들어 죽인 일은 사화와 당쟁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너무나 많다. 야만野蠻도
이런 야만이 없으리라.
생각이 다른 곳으로 빠졌다. 법왕루로 가는 길의 오른편 석축 위에는 보
우대사의 봉은탑과 비가 서 있다. 보우대사를 그렇게 죽였으니 부도가 있
을 수 없다. 보우대사의 탑비를 쳐다보면서 불법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
을 죽이는 역사의 여러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다. 헌법학자인 나로서 인간
의 가치와 존엄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멀지 않아 이 땅에
는 천주天主를 공부를 하다가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태가 발
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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