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고경 - 2022년 11월호 Vol.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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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묘역에 있는 모양을 싫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중에 자신과 자신
             이 낳은 명종과 같이 있기를 원했으리라. 1563년(명종 18)에는 13살로 죽은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3)의 사패祠牌를 봉안하기 위해

             봉은사에 강선전降仙殿도 세웠다. 뒤따라나올 역사의 장면을 미리 보면, 봉

             은사 중창 불사를 시작한 지 3년 후 문정왕후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자
             신이 이장한 정릉 묘역에도 묻히지 못한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4월에 승하하자 퇴계선생은 바로 사직 상소

             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곧이어 보우화상에 대하여 사헌부 등의 신료들과

             유생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졌고 1,000여 건에 이르는 상소 끝에 보우
             화상은 6월에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에도 보우화
             상을 죽이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멈추지를 않았으나 왕은 10월 달에도 이

             미 형이 확정되었으므로 추가로 논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를 윤허하

             지 않았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1528~1590)에 의하여 몽둥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죽이라는 왕명이
             없었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명종실록』에는 보우의 죽음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한 기록은 보이지 않

             는다. 1566년 11월의 기록을 보면, 보우화상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만 지
             나가는 말로 쓰여 있다. 조계종에서는 10월에 순교하였다고 새긴 보우대
             사순교비를 제주도 조천읍 조천리에 세워두고 있다. 그해 12월에는 율곡

             栗谷 이이李珥(1536~1584)선생이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그는 젊은 날 어머니를 여의고 잠시 금강산에서 불법에 침잠한 적이 있
             었지만 이 당시에는 보우화상을 요망한 중[妖僧]이라며 비판을 가하였다.
             문정왕후의 승하와 보우대사의 죽음 이후로 불교는 더욱 탄압되고 양종제

             도兩宗制度와 승과제도도 폐지되면서 침체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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