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8 - 고경 - 2022년 11월호 Vol.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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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나야마 신쇼(『고경』 22년 10월호)와 학문적 결이
                             비슷하다. 다만 하나야마가 인도철학과 출신으로
                             종교철학적 시점을 취했다면, 이에나가는 국사학

                             시점에서 일본불교를 바라봤다.
          사진 2.  1997년  최고판결
              후 기자회견 모습.
              앞줄 왼쪽 2번째가
              이에나가 사부로.        논포리와 종교 심취



           이에나가는 1913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마르

          크스주의와 종교서적에 심취했고, 군국 일본의 ‘국체國體’ 이데올로기에 사
          상적 충격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1937년 동경제국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제대 사료편찬소 촉탁(1937), 니가타新潟고등학교 전임강사(1941),

          제국학사원 촉탁(1943)를 거쳐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1944)로 근무했다.

                         그는 대학재학 시절 국사학과 학생 태반이 가입한 국가주
                       의자들의 모임인 주광회朱光會나 유물사관에 경도된 사회경
                       제 편중파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나가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군국주의에 영합하거나 편승하지 않았지

                       만, 침략전쟁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정치적 무정견자인
                       ‘논포리Nonpolitical’였다.”고 회고했다.
     사진 3. 『전쟁책임』(1985).

              “8월 15일, 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리석은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라는 지금 생각
              해 보면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한 번도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일본군의 침략지에서 얼마나 많은 이웃나라

              국민들이 비참한 운명에 빠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쟁 중에 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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