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2년 12월호 Vol.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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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할 그 당시의 기록은 없고, 이기복李起馥이 1935년에 쓴 「단상산고湍
上散稿」에 이 글씨를 쓰고 3일 후에 별세했다고 전한다.
판전 현판을 통해 읽는 추사선생의 고단한 삶
그건 그렇고, 나는 이 글씨를 볼 때마다 지독한 인간들이 뛰어난 인재를
결국 말려 죽였구나 하는 분노를 가누기 어렵다. 안동(=장동)김씨 세력이
경주김씨 세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경주김씨의 불세출의 다크호스를 아예
죽여버리자고 작당한 모함에 걸려 추사선생은 55세에 유배의 길에 올라
67세에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병든 노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노경金魯敬(1766〜1837) 선생의 신원伸
寃을 구하는 격쟁擊錚을 벌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적들은 기뻐했으리
라. 그때까지도 장동김씨 세력은 김좌근金左根(1797〜1869) 등을 중심으로
김조순金祖淳(1765〜1832) 가문이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부패권력으로 국정
을 농단하며 기고만장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사회 기반이 붕괴되고 1862
년에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번져나가고 나라는 기울어져 결국 조선이 멸
망하는 길로 빠지면서 그들의 권력놀음도 끝나게 된다. 나라가 망하고 없
는데 권력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백성들만 또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버
린 것이다.
‘국가권력의 사유화’, 즉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공권력을 이를 행사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행위는 헌법에서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것이다. 헌법은 이를 방
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사유화의 문제
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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