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고경 - 2022년 12월호 Vol.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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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
                                       서 미학전공으로 취직하기란 어려
                                       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이미 각오하

                                       고 전공을 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졸업 후 다행히도 그가 미학연구실
                                       의 조수가 되어서 나 또한 안심했
                                       던 기억이 난다. 이후 3년간 함께

              사진 2. 『신라·고려의 불상』 표지.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데, 그의 학문적 관심은
                                       미학에서 구체적 미술사 연구로 옮
                                       겨갔다. 미학연구실의 우에노 선생

                                       과 다나카 선생은 그를 각별하게 아

                                       꼈는데, 평소 매우 성실히 연구에
              사진 3.  1929년 경성제대 연구실에   임하였다. 그는 「조선의 전탑에 대
                   서 고유섭과 함께(왼쪽부터 고
                   유섭, 다나카 도요조 교수, 나카기리   하여」(1935),  「불국사의  사리탑」
                   이사오,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사
                   진 인천일보.             (1943) 등의 많은 논문을 쓰면서 당

                                       시까지 없던 문헌적· 예술사적 접
              근을 통해 독자적 연구를 이어갔다. 만일 고유섭 씨가 오래 살았다
              면 조선의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오세창의 『근역서

              화징』 같은 ‘조선 화인전畵人傳 집성’이라 불릴 수 있는 명저가 몇

              권 간행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유감이다.”


           나카기리는 한국에 있던 일본인 학자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는데, 한국의

          고전문헌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모임인  서물동호회의  회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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