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고경 - 2022년 12월호 Vol.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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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한다면 그것은
같음에 대한 집착이 되기
쉽다. 분별에 상대되는 분
별없음에 머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명
확한 인식이 사라진 어두
움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
다. 이 어두움이 망상의
일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공에
치우친 관찰[空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같
음과 다름의 통일체를 대
하면서 같음의 측면에 치 사진 2.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중하여 관찰하는 일이므로 편견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위의 예문에 보이는
바, “시방세계 그대로가 큰 반야이며 청정한 세계라는 말로는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 향곡스님의 설법이 가리키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 도달한 무심의 경계에 자족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공부
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성철스님의 ‘거듭 죽는 죽음’에 대한 질문이 일어
난 지점이고, 향곡스님의 새로운 화두참구가 일어난 시점이다. 예문에서
향곡스님이 말하는 차별삼매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이후의 풍경이다. 그러
기 위해서는 향곡스님이 차별삼매의 예로 든 ‘애석하다(可惜許), 관문(關),
하늘이시여(蒼天)’와 같이 새롭게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래 이것은
탄식의 어투를 담은 감탄사로서 진여와의 계합을 위해 무심에서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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