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고경 - 2022년 12월호 Vol.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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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였다. 그러기에 역대의 공안에 척척박사처럼 딱 맞는 대답을 내놓는다
             해도 “미친 소견이 충천한 일”이라고 판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화두 참구는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다. 최근 『선문정로』의 강의를 하는 중

             에 성철스님의 선어에 담긴 뜻을 묻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러면 죽

             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엔 어떠한가? 초初는 31이요, 중中은 9요, 하下는
             7이다. 억!!!” 하고 제시한 사중득활 설법의 결론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
             다. 이것을 나름의 깜냥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사실 역대의 공안들 역시

             그 맥락만 정확히 안다면, 그리고 성철스님이 즐겨 말하는 쌍차쌍조의 논

             리만 제대로 적용한다면 해석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성철스님이
             즐겨 말하는 쌍차쌍조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반야의 진공묘유, 천태의
             일심삼관, 임제의 삼현삼요三玄三要 역시 분별사유 차원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죽은 끝에 완전히 되살아나는 체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혹 어느 순간 역대 조사의 공안이 술술 풀린다 해도 스스로에
             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철저한 죽음에서 다시 죽은 끝에 나타난 되살
             아남인가? 일체의 번뇌와 속박이 사라진 대자유의 경계인가? 법계의 모든

             현장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고 있는가? 스스로 부처로 살고 있는가? 자

             신이 그렇지 못한데 큰스님이 인정한다고 해서 견성이 되고 해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매번 그대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섭섭해 할 일이 없다.

               생각해 보면 성철스님은 한 부류의 수행자만을 칭찬했다. 숙면일여를

             투과해야 견성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아, 견성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었습니까?” 하는 사람, 그리하여 기왕의 성취를 내려놓고 새로운 수행에
             들어가는 사람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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