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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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관 영화관 집 아들로 성장하다
▶ 그 당시 극장문화는 어떻했습니까?
일본 사람들 사는 지역에 영화관이 하나 있었는데 대승관이라고 그랬어
요. 일본말은 ‘다이쇼깐’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한국사람은 당시에 ‘조선사
람’이라 그랬는데, 조선사람들 사는 동네에 영화관이 하나 있는데 ‘원산관’
입니다. 그때 영화 산업이 대단히 호황일 때입니다. 뭐, 오락이 그거 밖에
별로 다른 게 없는 때이니까요. 그런데 소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은 출입을
엄하게 금지해서 맘대로 영화관에 못 가게 했어요. 영화관에는 꼭 뒷좌석
어두운 데 경찰관이 와서 임검이라고 하고서 학생들을 불러내곤 했지요.
또 학교 훈육주임이 가끔 나와서 학생들을 쫓아내고 그랬지요.
어려서 소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장을 크게 보려면 (아버지로부터) 돈을
좀 받아 와야 하니까 어린 나를 시켜서 “야 택수야, 아버지한테 가서 장 볼
돈 좀 달라고 그래라.” 하셨어요. 쪼르르 달려갔지요. 우리 집에서 원산관
까지 걸어서 15분이나 20분 정도 됐을 거예요. 극장에 가면 다른 애들은
어림없는데, 극장문 지킴이 있잖아요? 일본말로 ‘기도’라고 그럽니다. 큰
몸에 부리부리한
것이 딱 버티고 서
있었어요. 내가 가
면 극장주의 아들
이니까 어서 사무
실로 들어가라고
하지요. 지금 기억
에 그때 조금 크게 사진 5. 1920년대 원산시 중심거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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