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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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꼈고, 심신이 쇠약해져
서 낙산사와 금강산 유역의
사찰과 암자에 머물렀다.
당시 설악산 오세암에 있
던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고
결심하여 21세 때인 1933
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
사진 2. 이종익이 출가한 금강산 유점사 전경.
악을 은사로, 효봉을 계사
로 출가했다. 이후 전통적 강원교육인 이력과정을 이수했는데, 사교과는
유점사 동국경원에서 설하에게 배웠고, 대교과는 설호에게 지도를 받았
다. 1937년에는 개운사 대원암에서 근대기 불교계의 대표적 학승인 한영
(1870~1948)에게 대교과의 『선문염송』 등을 다시 배웠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근대 불교학의 새로운 사조를 익히기 위해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오사카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조
선인을 차별하는 것을 보고 고대에는 우리가 선진문명국이었음을 떠올리
며 민족문화사를 거슬러 민족의 얼을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다음해에 교토에 있는 임제종 전문학교(현재 하나조노 대학)에 들어갔고,
다시 도쿄에 소재한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에 편입했다. 이 무렵 그는 요코
하마의 가나자와 문고에서 보조지눌의 『화엄론절요』를 발견하였다. 『화엄
론절요』는 1295년에 필사된 사본으로 그는 연구를 위해 그 내용을 원고지
에 적어 왔다. 1944년 다이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 봉은사에 머
물면서 강원의 강주를 맡아 학인을 지도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불교계는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종교이자 민족종교로서 새 시대를 향해 나가야 했다.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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