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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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법운 이종익이 유학한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學) 전경.

          립의 벅찬 감격에 들떠 있던 1945년 9월 전국승려대회가 열렸고 조선불교

          혁신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사찰령 같은 구체제의 유산을 혁파
          하고 중앙의 교단 기구 설립과 교헌 제정이 결의되었다. 유학파 식자층이
          었던 이종익도 봉은사에서 불교중앙청년동맹을 결성했고, 1946년 5월에

          는 젊은 학승들과 불교혁신회를 조직해 승단 개혁과 민족불교 건설에 앞

          장서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 제약 속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환속하여 사회 속에서 불교 대중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948년 배영대학관(현재 경희대) 강사, 1951년 경기상업고 교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서울 대각사에서 철학사상 강좌를 개설해 불교 교리를 강의하

          고 신행 단체인 대각회를 이끌었다. 1955년에는 불교 정화의 소용돌이 속
          에서  보조지눌을  종조로  삼자는  보조종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후
          1968년에 동국대 불교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1975년 「한국불교의 연구: 고

          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모교 다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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