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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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되기 쉽다. 닦음의 대상을 설정하면 그로 인해 법을 실체화하는 법상
          의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예 닦지 말 것인가? 그
          럴 수는 없다. 참 생각할수록 불교의 수행은 이율배반적이다. 수행의 주체

          를 강화하지도 않고 법을 실체화하지도 않으면서 부지런히 공부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부지런한 화두공부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두참구
          는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밀고 나가는 공부다. 그 과정에서 부

          분적 눈뜸이라 할 체험도 있고,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얼음에 박 밀 듯 시

          원하게 이해되는 안목의 열림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간택한 화두참구
          의 최초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면 해결된 것이 없다.
           왜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라고 한 것일까? 경

          전의 어떤 구절, 조사의 어떤 말씀을 가져와도 이 공안 앞에서는 모두 주

          변을 맴도는 말이 될 뿐이다. 과녁의 중심을 직접 때리는 정답이 되지 못
          한다. 그래서 일체의 앎과 이해를 내려놓고 단 하나이자 만 가지인 정답을
          찾아 온몸을 던지는 참구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열심히 하는 공부가

          있음에도 주체와 대상이 강화되는 일이 없다.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리듯



           이러한 참선 수행에서 조심해야 할 가장 큰 장애가 있다. 바로 경전적 지

          식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삼는 일이다. 전통적 비유에 의하
          면 그것은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리는 일과 같다. 해파리는 눈이 없다.
          그런데도 어딘가를 향해 움직여 간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궁금히 여겼다.

          그러다가 그 아래에 새우가 사는 것을 보고는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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