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23년 2월호 Vol.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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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참선이라는 것 자체가 이해와
앎을 내려놓는 일에 해당한다. 이해와 앎의 틀을 깨는 일을 본질로 하는 것
이 참선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이해와 앎의 틀 속에 가져
다 놓으려는 일! 그것이 참선을 이해시키려 하는 노력의 정체가 아닐까?
이러한 상황을 늘 겪었기에 하신 말씀이겠지만 성철스님은 “사량분별을
떠나는 것이 불법의 도리인데 도리어 사량분별 속에서 불법을 헤아린다면
서울로 가려면서 부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셈”이 된다고 했다. ‘불법
은 깨닫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
렇다. 선사는 그래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학문적 접근을 병행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선에 대한 이야기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해 보지 않은 운동을 설명만 듣고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
까? 먹어 보지 않은 낯선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
이 쉬운 일일까?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실제적 상
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는 일들이다. 이렇
게 생각해 보니 유독 참선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좀 불공
평해 보인다. 참선이야말로 해 봐야 안다. 성철스님의 표현처럼 “속는 셈
치고라도 한번 해 보면” 그것이 바로 앎과 이해를 내려놓은 일이라는 걸 이
해하게 된다. 진실한 이해는 이해를 넘은 그 어딘가에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해를 넘은 저쪽 차원을 말할라치면 신비주의적 포장이라는
비판까지 돌아오는 마당이다. 왜 그럴까? 참선은 정신활동이다. 그리고 정
신활동인 한 그것은 오로지 이해의 범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들
을 한다. 설혹 그것이 이해 저쪽의 일이라 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되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칙적으로 선의 실천은 시비선악을 나누는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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