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23년 3월호 Vol.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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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가사의한 실상의 차원을 말로 드러내어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다행히 그때 대범천왕의 설법 요청이 일어난다. 여래의 49년 설법이 시
작될 수 있었던 인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인연에 따라 행해진
것이므로 8만4천 법문이 있게 된다. 그 법문을 필요로 하는 인연이 8만4천
의 번뇌를 가진 중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종다양한 인연에
맞추어 법이 설해지다 보니 불법 상호 간에 논리적 충돌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학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내적 모순의 발굴과 판정과 해
설을 내용으로 하게 된다.
돈오점수 비판은 문자와 지해에 대한 비판
성철스님의 법문에도 이러한 언어적 어긋남과 논리적 충돌이 발견된다.
예컨대 수좌 5계의 한 항목으로 널리 알려진 “일체 문자를 보지 말라.”는 독
서 금지의 강령만 해도 그렇다. 원래 이것은 성철스님이 본격적인 참선 수
행자들에게 계율 삼아 지키도록 제시한 실천 강령이었다. “도를 닦는 데 경
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신문
쪼가리를 보는 일조차 꾸짖었다는 원택스님의 회고담이 전할 정도로 그 실
행 의지는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선문정로』를 반추해 보면 그 핵심 주제인 돈오점수 비판은
곧 문자와 지해에 기대는 참선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게 된
다. 분명히 경전을 많이 읽고 깊이 사유하다 보면 남다른 통찰이 일어난다. 이
통찰을 출발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 그 깨달음을 완성하자는 것
이 돈오점수론의 기본적 주장이다. 그러니까 돈오점수의 돈오는 곧 해오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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